양치식물은 산불이 지나가고 난 자리에 서둘러 초록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불길이 닿지 않은 뿌리줄기에서 다시 싹을 낼 수 있고, 몸집을 빠르게 키워 포자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군락을 이뤄 망가진 땅이 더 다양한 생명을 품을 수 있도록 이끈다. 아네카트린 푸르키스 제공


고향에 계신 엄마 손등이 유독 그을렸기에 이유를 여쭈었다. 봄을 통과하는 동안 “고사리 꺾느라 그랬다”고 답하신다. 뿌리째 먹는 봄나물 냉이는 흔히 “캔다”고 하지만, 고사리는 “꺾는다”고 한다. 열매 맺고 나면 뿌리마저 시드는 두해살이 냉이와 달리 고사 릴게임갓 리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엄마는 당신 엄마에게 배웠다며 고사리 뿌리가 상하지 않게 순만 꺾으라고 어린 내게 알려주셨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따라 그 애순을 모으며 나는 식물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냉이는 ‘캐고’ 고사리는 ‘꺾고’
밥상과 제사상을 넘나들며 나물로 활약하는 고사리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모바일바다이야기 식물. 우리 땅에 나는 고사리, 청나래고사리, 고비, 섬고사리, 응달고사리 등 여러 종류의 고사리를 크게 구분하지 않고 고사리나물이라 부르며 식용한다. 고사리라는 이름은 굽어 산다고, 옛말 ‘곱다’와 ‘살이’에서 나왔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우리가 나물로 먹는 건 어린 고사리의 돌돌 말린 잎사귀다. 잎이 벌어지고 완전히 자라기 전인 봄에 주로 수확하는.
야마토통기계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끝부분에 있는 나선 모양의 스크롤을 닮아서 영어권 국가에서는 고사리순을 ‘피들헤드’(Fiddlehead)라고 한다. 천주교 주교들이 쓰는 지팡이를 떠올리게 한다고 ‘크로지어’(Crozier)라는 애칭도 있다. 동글하게 감긴 고사리순은 수학적이고 기하학적이다. 실제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가 1638년 이름 붙 황금성사이트 인 ‘등각나선’(정점에서 뻗어 나간 모든 선과 일정한 각을 이루는 곡선)을 자연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형적인 예가 고사리순이다.
고사리순에는 프타킬로사이드와 티아미나아제와 같은 독성 물질이 들어 있다. 우리 선조들은 고사리를 삶고 비벼 말리는 과정에서 그러한 독성이 제거된다는 걸 아주 먼 과거부터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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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


하루는 엄마가 건고사리를 둥글게 틀어 만든 똬리 두 개를 내게 건네주셨다. 하나는 집 주변에서 꺾은 고사리고 다른 하나는 선산의 깊은 골짜기에서 얻은 고비라고 했다. 고사리보다 대가 굵고 식감이 좋은 고비가 채취하고 말리는 과정도 훨씬 더 까다롭다면서. 마른 고사리처럼 어둡게 쪼그라진 엄마 손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칫, 그렇게 고생 안 하셔도 되는데.
우리 엄마 손에 이끌려 마른 몸을 배배 꼰 채 내 앞에 도착한, 그 깊은 곳에 사는 고비는 고사리류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식물이다. 고비의 몸체가 아로새겨진 트라이아스기 식물화석이 발견되므로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약 2억 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보다 오래됐다고 하는 고사리류 화석은 무려 3억5천만 년 전인 석탄기의 것이다.
고사리 무리의 식물을 한자식 표현을 써서 양치식물(羊齒植物)이라고 부른다. 잎의 가장자리가 들쑥날쑥한 게 마치 양의 이빨을 닮았다는 뜻이다. 그 생김새가 깃털 같다고 과학계에서는 테리도파이트(Pteridophyte)라고 한다. 깃털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접두사 ‘Pterido-’에 식물을 의미하는 접미사 ‘-phyte’를 합친 말이다. 꽃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은화식물(隱花植物) 또는 민꽃식물이라 부르기도 한다.
3억5천만 년 전부터 살아온 고사리
지금은 호모사피엔스가 함부로 설치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양치식물이 이 행성의 주인과도 같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지층에서는 확인된 식물 화분의 약 90%가 고사리의 것이기도 하다. 고사리가 우점했던 시기를 말할 때 ‘고사리 정점’(fern spike)이라는 고생물학 용어를 쓴다. 주로 대멸종 직후에 해당하는데 그중에서도 백악기가 끝날 무렵에 최고조에 달했다.
약 6600만 년 전 지구는 소행성 충돌과 화산 활동으로 대기가 차단됐다고 한다. 볕이 안 드니 광합성을 하지 못하는 식물이 먼저 죽기 시작했고 공룡을 포함한 동물이 연이어 죽어 나갔다. 당시 생물 종의 75%가 지구에서 사라졌다고 현대 과학은 분석한다. 이름하여 ‘백악기 대멸종’. 백악기의 종말을 초래한 그 재앙은 달리 말해 화마의 습격이기도 했다.
폐허가 된 지구에 푸른 숨결을 다시 불어넣은 건 고사리였다. 자연사는 말한다. 고사리는 화재 이후 최초 정착자요, 황폐한 땅의 선구자라고. 백악기가 끝난 6600만 년 전부터 2300만 년 전까지 이어진 신생대 첫 번째 시기-를 고진기라 한다-에 폭발적으로 증가한 생명체는 양치식물이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불길이 닿지 않은 뿌리줄기에서 다시 싹을 낼 수 있고, 몸집을 빠르게 키워 포자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군락을 이뤄 망가진 땅이 더 다양한 생명을 품을 수 있도록 이끄니까.



돌돌 말린 생김새 때문에 고사리순은 영어권 국가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현악기 끝에 있는 나선 모양의 스크롤을 닮아서 ‘피들헤드’, 천주교 주교들이 쓰는 지팡이가 떠오른다고 ‘크로지어’라고 불린다. 게티이미지뱅크


종자(種子)로 번식하는 속씨식물과 달리 양치식물은 먼지처럼 생긴 포자로 번식한다. 포자(胞子), 한자 그대로 세포로 된 씨앗이라는 뜻이다. 맨눈으로 관찰하는 게 쉽지 않지만, 포자는 어디로든 어떻게든 날아가서 뿌리를 내린다. 그 산포 전략을 써서 종족 번식과 진화에 성공한 양치식물이 오늘날 1만2천 종에 달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고사리 씨앗을 몸에 지니면 사람들 역시 모습을 감출 수 있다고 믿던 때도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4세’의 2막 1악장에 고사리는 이렇게 등장한다. “우린 고사리 씨앗을 지니고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게 다닐 수 있어.”
유월이 깊어갈수록 적도 북쪽 국가에 사는 이들의 마음은 한여름 쪽으로 기운다. 그 시작과도 같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일 년의 딱 하루, 하지(夏至)를 북반구에서는 의례와 축제의 날로 지내기도 할 것이다. 북유럽에서는 보이지 않는 고사리 꽃이 하지 전야에만큼은 볼 수 있다는 설화가 있다. 고사리에 관한 옛이야기를 나누며 사람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시를 낭송하고 노래하고 춤춘다. 가톨릭 문화는 하지 무렵 성요한 세례자 탄생일을 기념한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고사리 씨앗이 성요한 축일 전날 밤에만 퍼진다는 믿음과 함께.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고사리 씨앗
내가 일하는 경북 봉화의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는 하지를 통과하며 다양한 고사리가 잎을 활짝 펼친다. 그중 청나래고사리가 내 눈에는 특히 예쁘다. 잎이 푸른 날갯짓을 하는 것 같다고 고사리 앞에 ‘청나래’라는 접두어가 붙은 양치식물. 수목원의 여러 장소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자주 찾는 ‘고산습원’의 청나래고사리는 그 특유의 연둣빛 색감으로 연보랏빛 부채붓꽃과 그 너머 연못에 동동 뜬 왜개연꽃과 어우러져 정말 아름답다. 나는 그 훌륭하고 갸륵한 풍경을 입을 다 다물지 못한 채 보게 된다.
청나래고사리는 잎이 타조 깃털을 닮았다고 서양에서는 타조고사리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정원에서 인기 있는 관상용 식물이기도 해서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수여하는 가든메리트상도 받았다. 영국의 고사리 열풍은 빅토리아 시대에 대단했다. 속국 곳곳의 희귀한 양치식물을 서로 캐와서 자랑하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고 그 문화는 아메리카 대륙으로도 이어졌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고산습원의 청나래고사리 군락. 잎이 푸른 날갯짓을 하는 것 같다고 고사리 앞에 ‘청나래’라는 접두어가 붙은 양치식물. 잎이 타조 깃털을 닮았다고 서양에서는 타조고사리라는 별명을 지어 부른다. 정원에서 인기 있는 관상용 식물로 영국왕립원예협회가 수여하는 가든메리트상도 받았다. 허태임 제공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신경과 전문의이자 작가 올리버 색스는 자신이 ‘양치식물광’이라고 고백한다. “나는 1930년대 양치식물이 가득한 정원이 있는 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꽃을 피우는 식물보다 양치식물을 더 좋아하셨고 (…) 장미 덩굴이 있기는 했지만, 화단은 거의 양치식물의 차지였다.”
환갑 되던 해부터 2015년 일찍이 눈에 생겼던 암이 간으로 전이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색스는 23년 동안 미국양치식물협회 회원이었다. 멕시코 오악사카(와하카)에서 양치식물 탐사 과정을 멋지게 기록한 책 ‘오악사카 저널’을 낸 적도 있다. 우리나라에 300여 종, 북미 전체에 400여 종의 양치식물이 있는데 오악사카에만 700여 종의 양치식물이 산다. 양치식물 애호가들에게 얼마나 흥미로운 곳일까.
그곳 탐사에 함께 나섰던 뉴욕식물원의 양치식물 전문가이자 ‘양치식물의 자연사’의 저자 로빈 C. 모런 박사는 색스를 회고하며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색스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여러 종류의 양치식물을 키웠어요. 집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 종류와 그들이 어떻게 포자를 방출하여 번식하는지를 알려주며 아이처럼 좋아했습니다.” 특히 고사리류의 약성과 인류의 삶에서 활용된 사례에 대해 듣는 것을 그가 즐겼다고도 덧붙였다.
차와 약재로도 사용된 양치식물
고대 그리스인들은 여러 종류의 양치식물을 천식, 탈모, 신장병 등을 다스리는 데 두루 처방했고 중세 유럽에서는 그중에서도 관중이 ‘만병통치약’급으로 통했다. 대만에서는 자루나도고사리삼 잎을 향을 음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몸에도 좋다며 전통차로 마신다. 북한의 식물학자 도봉섭과 임록재는 ‘한국약용식물사전’에서 관중, 부처손 등 한반도에 사는 40여 종의 양치식물을 약재로 소개했다.
인류를 구하는 고사리의 능력 중 제일은 지구 멸종을 수차례 겪으며 축적해온, 폐허를 치유하는 마법과도 같은 힘일 터이다. 요즘 나는 경북 의성과 안동과 청송과 영양과 영덕의 산불피해지 현장을 조사하며 수북하게 자란 고사리 무리를 자주 만난다. 수억, 수천만 년 전에 지구에 등장한 그들이 지금 내가 딛고 선 황폐한 땅의 회복을 촉진하려 잎을 펼치고 땅속 뿌리줄기를 힘껏 뻗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과 애쓰는 힘과 노력을 읽으며 나는 어느 정도 안도하고 더 많이 희망한다.



고비. 허태임 제공


허태임 식물분류학자·‘숲을 읽는 사람’ ‘식물분류학자 허태임의 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기자 admin@no1reelsi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