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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영 기자]
문학,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부모와 자식 관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성(paternity)과 모성(maternity)의 문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을 신비화하는 건 특별할 게 없고, 여전히 많은 작품이 상투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신비화된 모성 신화를 단호하게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부성과 모성의 구분을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 스티븐은 "부성은 법적 허구(legal fiction)일 수 있지만, 모성은 육체에 근거한 사실이다"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라고 정리한다. 부성은 믿음과 사회적 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모성은 육체적 출산이라는 감각적이고 자연적 경험에 근거한 확실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화제의 드라마였던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장면을 내가 인상 깊게 본 이유다. 이 드라마는 자식을 바다이야기룰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모성이 탄생하는지, 모성이 무조건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물으면서 모성 신화를 해체한다. 동은 엄마는 가해자들(박연진 일당)이 행사하는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딸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가해자들과 돈을 매개로 협작하면서 동은을 지옥으로 내몬다.
동은 엄마는 딸의 고통을 돈과 교환한다. 엄마가 동은에게 더 깊은 배신과 릴게임다운로드 절망을 안겨준다. 동은은 모성의 역할을 완전히 방기한 엄마를 정신병원에 냉혹하게 격리한다. 그렇게 술, 빚, 협박 등으로 동은을 계속해서 괴롭힌 트라우마의 근원을 제거한다. <더 글로리>는 묻는다. 모성은 무엇인가? 모성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자녀에게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도 무조건 존중해야 하는가?
결론을 당겨 말하 한국릴게임 면 부모-자식이 맺는 관계는 상호존중의 관계여야 하고, 그때도 당연히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부모이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존중해야 자식이 부모를 존중한다. 선후가 그렇다.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이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이지만, 먼저 줘야 하는 것은 부모다. 그게 자연의 이치이다.
영화 <프랑켄슈 검증완료릴게임 타인>이 보여주는 뒤틀린 부자 관계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의 모습.
ⓒ 넷플릭스
1818년 출간된 이후 SF 문학의 기원이 되었고, 수많은 후속 작품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영화로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프랑켄슈타인>(아래 <프랑켄>)을 보면서 부성과 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수업에서 SF 영화를 강의한다. 8편의 영화를 한 학기 동안 다룬다. 그중에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994)도 있다. 이 영화는 원작에 대체로 충실하지만, 영화 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와 달리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설정을 많이 변경한다. 그 이유는 원작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시점에서 주로 묘사되는 피조물(creature)의 존재감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의 구성을 피조물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1부, 그리고 피조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2부로 나누었다.
원작을 과감하게 각색한 델 토로 영화의 고갱이는 2부에 있다. 이 영화를 해석할 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평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 관계에서 우리 시대에도 괴물처럼 출몰하는 인종주의, 혐오, 배제의 극우주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주제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은 델 토로의 이전 영화인 <물의 모양 (the Shape of Water)>(2017)에서 설득력 있게 다뤘다.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평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낯선 존재를 무조건 괴물이라고 칭하는 본능적 적대감을 갖고 있다. 인간이란 종의 한계다. 그러나 영화에 드러나듯이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낯선 생명체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실감 나는 악역인 스트릭랜드나 그의 상관인 장군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일라이자는 그녀와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인 이웃의 게이 예술가 자일스에게 이 생명체를 구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말한다. '우리가 그를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것이다'라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의 모습에서 지금, 이곳 한국사회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외적 형상이 인간다움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길영, <아름다운 단단함> )
<프랑켄>은 다른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관계를 묻는다. <물의 모양>에 나오는 생명체는 자연에서 나타난 미지의 생명체이지만, <프랑켄>의 피조물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기에 창조자 빅터와 피조물은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한다.
<프랑켄>은 원작이나 브래너 영화에서는 다소 흐릿하게 처리되었던 아버지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피조물에게 빅터는 아버지이자 동시에 어머니가 된다. 그런데 빅터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피조물의 탄생 이후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의 책임을 모두 피조물에게 떠넘긴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어린 시절 빅터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 넷플릭스
영화에는 두 가지 부자 관계가 나온다. 빅터와 그의 아버지, 빅터와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관계. 둘 다 뒤틀린 부자 관계다. 거기서 비극이 싹튼다. 빅터가 피조물을 버리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피조물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아버지를 대신하는 복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빅터는 아버지를 어찌할 수 없기에 피조물을 학대하고 죽이려 든다. 빅터의 아버지는 원작과는 달리 아들 빅터에게 어떤 정도 주지 않고 냉혹하게 의학 지식만을 탐구하면서 그런 지식을 배울 것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게 하려는 욕망에만 사로잡힌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빅터의 아버지이지만 부성은 없는 '법적 허구'일 뿐이다. 빅터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보호자이자 애인이다.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아버지는 빅터의 동생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살리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빅터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욕망으로 바꾼다. 그의 욕망은 원작의 부제인 '근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뜻하듯이 인류에게 불멸의 지식을 전달하겠다는 욕망, 정확히 표현하면 죽음을 정복하려는 광기로 이어진다.
누가 '괴물'을 만드는가
델 토로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영화는 사체 더미에서 완전한 신체를 찾아내 피조물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빅터가 드러내는 집요한 욕망과 광기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섬찟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은 원작이나 이전 영화의 기괴한 모습과는 달리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이다. 피조물의 표정은 어린아이같이 온화하다. 영화에도 언급되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묘사되는 에덴동산의 아담 같은 모습이다.
아담은 아름답지만 무지하다. 밀턴 작품에서 아담은 자신의 자만심으로 추방되지만, 빅터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종의 정신적 학대, 제대로 의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았던 학대를 피조물에게 되풀이한다.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피조물의 무지함을 이유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피조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로 피조물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학대한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피조물(제이콥 엘로디)의 모습.
ⓒ 넷플릭스
피조물은 거인 같은 몸과 힘을 지녔지만, 탄생 당시에는 아기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무지한 존재다. 그런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빅터는 그 책임을 버린다. 그리고 종국에는 불을 질러 피조물을 죽이려고 한다. 여기까지가 1부 빅터의 이야기다. 2부는 그렇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피조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피조물의 이야기는 버림받고 세상에 내던져진 한 존재가 자신이 베푼 선의와 친절을 오해와 폭력으로 돌려주는 인간들에 대해 복수심을 키우게 되면서 어떻게 괴물(monster)로 변모해 가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묻게 된다. 괴물은 탄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답지 못한 어머니가 괴물을 만든다. 자신들과 다른 낯선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폭행하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괴물을 만든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단호하게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모녀 관계를 청산했지만, <프랑켄>에서 죽지도 못하는 저주를 받은 피조물은 고독하게 북극의 설원에 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제 인간에 의해 괴물이 된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기자 admin@slotnara.info
문학, 영화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부모와 자식 관계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성(paternity)과 모성(maternity)의 문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을 신비화하는 건 특별할 게 없고, 여전히 많은 작품이 상투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내가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그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이런 신비화된 모성 신화를 단호하게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부성과 모성의 구분을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스>에 나오는 주인공 스티븐은 "부성은 법적 허구(legal fiction)일 수 있지만, 모성은 육체에 근거한 사실이다" 바다이야기예시야마토게임 라고 정리한다. 부성은 믿음과 사회적 제도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모성은 육체적 출산이라는 감각적이고 자연적 경험에 근거한 확실한 사실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럴까?
화제의 드라마였던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이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된 지금까지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장면을 내가 인상 깊게 본 이유다. 이 드라마는 자식을 바다이야기룰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저절로 모성이 탄생하는지, 모성이 무조건 존중받아야 하는지를 물으면서 모성 신화를 해체한다. 동은 엄마는 가해자들(박연진 일당)이 행사하는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딸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라, 가해자들과 돈을 매개로 협작하면서 동은을 지옥으로 내몬다.
동은 엄마는 딸의 고통을 돈과 교환한다. 엄마가 동은에게 더 깊은 배신과 릴게임다운로드 절망을 안겨준다. 동은은 모성의 역할을 완전히 방기한 엄마를 정신병원에 냉혹하게 격리한다. 그렇게 술, 빚, 협박 등으로 동은을 계속해서 괴롭힌 트라우마의 근원을 제거한다. <더 글로리>는 묻는다. 모성은 무엇인가? 모성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자녀에게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부모도 무조건 존중해야 하는가?
결론을 당겨 말하 한국릴게임 면 부모-자식이 맺는 관계는 상호존중의 관계여야 하고, 그때도 당연히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부모이다. 부모가 자식을 먼저 존중해야 자식이 부모를 존중한다. 선후가 그렇다. 주고받는 것(give and take)이 인간관계의 기본 원리이지만, 먼저 줘야 하는 것은 부모다. 그게 자연의 이치이다.
영화 <프랑켄슈 검증완료릴게임 타인>이 보여주는 뒤틀린 부자 관계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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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출간된 이후 SF 문학의 기원이 되었고, 수많은 후속 작품에 영감을 제공하면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해 온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다시 영화로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프랑켄슈타인>(아래 <프랑켄>)을 보면서 부성과 모성의 문제를 생각했다. 나는 이번 학기에 학부 수업에서 SF 영화를 강의한다. 8편의 영화를 한 학기 동안 다룬다. 그중에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994)도 있다. 이 영화는 원작에 대체로 충실하지만, 영화 미학적으로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그와 달리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설정을 많이 변경한다. 그 이유는 원작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시점에서 주로 묘사되는 피조물(creature)의 존재감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감독은 영화의 구성을 피조물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1부, 그리고 피조물의 이야기를 다루는 2부로 나누었다.
원작을 과감하게 각색한 델 토로 영화의 고갱이는 2부에 있다. 이 영화를 해석할 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평하는 건 자연스럽다. 그 관계에서 우리 시대에도 괴물처럼 출몰하는 인종주의, 혐오, 배제의 극우주의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런 주제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받은 델 토로의 이전 영화인 <물의 모양 (the Shape of Water)>(2017)에서 설득력 있게 다뤘다.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평했다.
"인간은 자신에게 낯선 존재를 무조건 괴물이라고 칭하는 본능적 적대감을 갖고 있다. 인간이란 종의 한계다. 그러나 영화에 드러나듯이 괴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히려 낯선 생명체가 아니라 인간들이다. 실감 나는 악역인 스트릭랜드나 그의 상관인 장군이 그런 예이다. 그래서 일라이자는 그녀와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인 이웃의 게이 예술가 자일스에게 이 생명체를 구하는 것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말한다. '우리가 그를 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인 것이다'라고. 이 영화에 나오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물의 모습에서 지금, 이곳 한국사회 괴물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외적 형상이 인간다움을 규정하지 않는다." (오길영, <아름다운 단단함> )
<프랑켄>은 다른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관계를 묻는다. <물의 모양>에 나오는 생명체는 자연에서 나타난 미지의 생명체이지만, <프랑켄>의 피조물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그렇기에 창조자 빅터와 피조물은 유사 부자 관계를 형성한다.
<프랑켄>은 원작이나 브래너 영화에서는 다소 흐릿하게 처리되었던 아버지와 아들, 혹은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탐구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지 않은 피조물에게 빅터는 아버지이자 동시에 어머니가 된다. 그런데 빅터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피조물의 탄생 이후 벌어지는 비극적 사건의 책임을 모두 피조물에게 떠넘긴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어린 시절 빅터는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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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두 가지 부자 관계가 나온다. 빅터와 그의 아버지, 빅터와 그가 창조한 피조물의 관계. 둘 다 뒤틀린 부자 관계다. 거기서 비극이 싹튼다. 빅터가 피조물을 버리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피조물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 아버지를 대신하는 복수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빅터는 아버지를 어찌할 수 없기에 피조물을 학대하고 죽이려 든다. 빅터의 아버지는 원작과는 달리 아들 빅터에게 어떤 정도 주지 않고 냉혹하게 의학 지식만을 탐구하면서 그런 지식을 배울 것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되게 하려는 욕망에만 사로잡힌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빅터의 아버지이지만 부성은 없는 '법적 허구'일 뿐이다. 빅터에게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보호자이자 애인이다. 당대 최고의 의사였던 아버지는 빅터의 동생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를 살리지 못한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빅터는 아버지를 뛰어넘어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욕망으로 바꾼다. 그의 욕망은 원작의 부제인 '근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뜻하듯이 인류에게 불멸의 지식을 전달하겠다는 욕망, 정확히 표현하면 죽음을 정복하려는 광기로 이어진다.
누가 '괴물'을 만드는가
델 토로 영화가 대개 그렇듯이, 영화는 사체 더미에서 완전한 신체를 찾아내 피조물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빅터가 드러내는 집요한 욕망과 광기를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섬찟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창조된 피조물은 원작이나 이전 영화의 기괴한 모습과는 달리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이다. 피조물의 표정은 어린아이같이 온화하다. 영화에도 언급되는 밀턴의 <실낙원>에서 묘사되는 에덴동산의 아담 같은 모습이다.
아담은 아름답지만 무지하다. 밀턴 작품에서 아담은 자신의 자만심으로 추방되지만, 빅터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일종의 정신적 학대, 제대로 의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받았던 학대를 피조물에게 되풀이한다. 빅터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는 피조물의 무지함을 이유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피조물을 만들어 냈다는 이유로 피조물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학대한다.
▲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피조물(제이콥 엘로디)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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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은 거인 같은 몸과 힘을 지녔지만, 탄생 당시에는 아기와 같은 순수함을 지닌 무지한 존재다. 그런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교육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빅터는 그 책임을 버린다. 그리고 종국에는 불을 질러 피조물을 죽이려고 한다. 여기까지가 1부 빅터의 이야기다. 2부는 그렇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피조물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피조물의 이야기는 버림받고 세상에 내던져진 한 존재가 자신이 베푼 선의와 친절을 오해와 폭력으로 돌려주는 인간들에 대해 복수심을 키우게 되면서 어떻게 괴물(monster)로 변모해 가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그래서 묻게 된다. 괴물은 탄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만들어지는가? 아버지답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답지 못한 어머니가 괴물을 만든다. 자신들과 다른 낯선 외모를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폭행하고 총을 쏘는 사람들이 괴물을 만든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은 단호하게 자신을 학대한 엄마를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으로 모녀 관계를 청산했지만, <프랑켄>에서 죽지도 못하는 저주를 받은 피조물은 고독하게 북극의 설원에 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제 인간에 의해 괴물이 된 그가 갈 곳은 어디인가? 기자 admin@slotnara.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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